여기, 영국 잉글랜드의 바닷가도시 스케그니스에 사는 한 여자가 있습니다. 이름은 켈리. 나이는 스물일곱이고 회사에 다녀요. 취미는 엄마와 매일 바닷가 산책하기.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걸을 때도 있고, 때로는 맨발로 모래사장에 들어가 게를 잡기도 하죠. 켈리는 발에 모래가 묻는 것을 불쾌해하지도 않고, 게에게 물리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아요. 켈리는 거침없고 대범한 여자거든요.

이쯤에서 여러분의 머릿속에서 켈리는 어떤 이미지로 그려졌는지 생각해 보세요. 내리쬐는 햇볕에 그은 피부를 가진 여자? 땀 흘리며 모래사장을 내달리는, 활력 넘치는 여자? 엄마의 손을 잡고 바닷가를 거니는 사랑스러운 여자?

여러분의 상상력에 힌트를 주기 위해 켈리에 대한 설명을 하나 더 추가해보겠습니다. 켈리는 장애인이에요. 다운증후군을 갖고 태어났죠. 다시, 지금 당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켈리의 모습은 어떤가요?

“다운증후군은 켈리의 전부가 아니”지만, 사람들은 켈리를 다운증후군을 가진 장애인으로만 평가합니다. 켈리가 맨발로 모래사장에 들어가기를 즐기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그가 스스로 신발을 갈아신지 못할 것을 걱정하고요. 켈리의 거침 없고 대범한 성격은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 큰 소리를 내고 떼를 쓰는 것으로 치부되기도 해요. 

이것이 바로 켈리에게 비장애인 남자 친구 닐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엄마인 아그네스가 분노를 참지 못한 이유이고, 객석에 앉아 있던 필자가 켈리의 마음이 다치지는 않을까 지레 겁먹은 이유입니다. 또한, 20대 후반의 여자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만으로 인물 간 갈등이 폭발하는 연극 <젤리피쉬>가 만들어진 이유이기도 하죠.

켈리는 닐과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함께 잠을 자고 싶어해요. 사람들의 시선에 스킨십을 망설이는 닐에게 먼저 다가가 입을 맞추고, 야한 농담도 해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켈리는 거침없고 대범한 여자거든요.

두 사람은 아그네스 몰래 만나고, 몰래 섹스합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있던 아그네스는 켈리에게 새 남자친구를 소개해 주려고 하는데 저신장 장애를 가진 도미닉이 그 주인공입니다. 아그네스는 켈리가 자기와 같은 장애인과 연애하기를 바라요. 하지만 아그네스가 주선한 깜짝 소개팅은 켈리가 임신 사실을 고백하면서 산산조각 나버립니다.

두 번째 갈등의 폭발. 아그네스는 켈리의 임신을 용납하지 않고, 출산은 더더욱이나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요. 그가 켈리의 출산을 반대하는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돌봄이 필요한 켈리가 아기를 돌볼 수 있으리란 확신이 없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유전 법칙에 따라 켈리가 다운증후군 아기를 낳을 확률이 존재하기 때문이에요. 아그네스는 켈리에게 아기의 장애 유무를 미리 테스트하고 만일 장애가 있다고 밝혀진다면 임신 중단(낙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그네스는 켈리에게 켈리를 사랑하지만, 다운증후군 아기의 탄생이 축복은 아니었노라고 고백하고, 켈리는 친구가 된 도미닉에게 묻습니다. “이러면… 우리 같은 사람들이 세상에 남아 있게 될까? 앞으로도? 계속?”

<젤리피쉬>가 두 사람의 갈등으로 하여금 객석에 던진 묵직한 질문은 마음에 남아 팽팽한 고무줄처럼 양립합니다.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하고, 그와 사랑하고, 섹스하고, 그 사이에 생긴 아기를 낳아 기르며, 새로운 가족을 일궈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겠다는 켈리의 의지를 누가 비난할 수 있겠어요. 동시에 그 과정에서 켈리가 감당해야 할 일들, 태어날 아기가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켈리가 버틴(버텨야 할) 10개월(임신 기간) 플러스 알파의 시간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마치 아그네스처럼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한 걱정이 불쑥불쑥 고개를 치미는 것을 막을 수도 없죠.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장애를 축복할 수 없는 마음은 또 어떻고요.

<젤리피쉬>의 해피엔딩에 몰입하지 못한 채 다 끝나버린 희곡의 다음장을 멋대로 걱정하는 데는 현실적인 이유가 가장 큽니다. 현실의 켈리들이 무대 위 켈리처럼 자기 선택을 충분히 존중받는 삶을 살 수 있을지, 장애 여성의 주체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만큼 우리 사회는 성숙할지 의문이 남기 때문이죠.

우리나라의 한 위키 플랫폼에는 ‘경계선 지능인’을 검색하면 ‘경계선 지능인 여자애들은 백치미가 있어 다루기 쉽다’는 내용의 문구가 실린 적도 있는데요. 사회가 신체·지적 장애를 가졌거나 지적 수준이 평균 이하인 여성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는지 실감할 수 있는 예시입니다.

<젤리피쉬>는 그런 의미에서 장애 여성의 삶과 사랑에 관한 이상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작품이에요. 켈리가 축복 속에 아기를 낳아 엄마가 될 수 있었던 데는, 그리고 좋은 엄마가 될 것이라 다짐할 수 있었던 데는, 켈리를 이루는 또 다른 요소들, 그의 주변 사람들의 영향이 커요. 거침없고 대범한 켈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사랑하고 존중하는 아그네스, 닐, 도미닉이 있기에 켈리는 자신의 사랑할 권리를 지킬 수 있었을 겁니다. 현시점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이죠.

희곡 안팎으로 그간 조명받지 못했던 장애 여성의 삶을 다루며 오래도록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하는 질문을 던지는 <젤리피쉬>는 오는 4월 13일까지 서울 충정로 모두예술극장에서 상연합니다.